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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Enzaim Life/Enzaim Culture

나는 엔자이머들이 모르는, 혹은 모를 법한 이런걸 알고 있다_앤디워홀 전시전_인턴 반지혜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2. 18.


안녕하세요. 엔자임 인턴 반지혜입니다.
블로그 포스팅이 많이 늦였지요? 죄송합니다.
김영화 대리님께서 상큼한 주제(?)를 주셔서 그 주제에 대해 일주일 동안 생각하느라 늦고,, 티스토리 사용 방법을 몰라 헤매고
여러가지 변명들로 글을 못 올렸습니다.
여튼, 김영화 대리님께서 주신
그 주제는 바로바로바로바로!

[나는 엔자이머들이 모르는, 혹은 모를 법한 이런걸 알고 있다]

그래서 뭐가 있을까 생각을 하다가 출근 첫 날이 기억 났습니다.
이유나 과장님과 신창호 대리님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나가는 길에 시립 미술관을 보며 있었던 일입니다.

"앤디 워홀 전시 보고 싶다. 회사가 가까우니까 전시 같은 것도 많이 보겠어요" 라고 말하니 신창호 대리님께서 대답해주시길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데 막상 그렇지 못해요. 전시 하는 시간에 퇴근한 적이 별로 없어서. 한 2번 갔나?"

그랬습니다. 누구나 시립 미술관이 가깝게 있으니 엔자이머 식구들이 전시를 자주 볼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데 (저 또한 그랬고)
바쁜 회사 생활로 인해 전시를 가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게, 제가 찾아낸 엔자이머들이 모르는 혹윽 모를 법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지금 시립 미술관에서 하고 있는 앤디워홀의 전시에 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앤디워홀의 위대한 세계_ 이제부터 시작 하겠습니다 :)

 

 

미술의 예술성을 공장에서 찍어내는 사람.
하는 일들 마다 미치광이로 손가락질 받아도, 그것이 예술 자체였던 사람.
예술의 기류를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 뉴욕으로 바꿔 버린 사람.
그 사람은 바로,

팝 아트의 대가  앤디 워홀이었습니다.


 


1950대에 예술 기류는 파리에서 뉴욕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세계 유명 화랑들이 앞 다투어 뉴욕에 들어왔고, 세계 미술품의 가격이 논의 되었죠. 그 만큼 뉴욕은 누구에게나 기회가 열려있는 기회의 도시였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직후, 뉴욕에 일간지, 대형 방송국들이 둥지를 틀었고, 이들을 따라 광고회사도 뉴욕으로 몰려들었습니다. 1950년대 그래픽 디자이너 일자를 구하던 앤디워홀에게는 아주 좋은 환경이었죠! 1949년 졸업 후 뉴욕에 정착하여 잡지 삽화와 광고 제작 등 상업 미술가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때 앤디워홀의 활동지는 맨해튼에서 주로 이뤄졌다고 합니다.

 1970년대에 닥친 2번의 오일 쇼크는 뉴욕 시민들에게 엄청난 어려움을 안겨주었습니다. 5명 중 3명은 실업자였고, 맨해튼에는 텅 빈 건물과 공장이 늘어갔습니다. 넓고 탁 트인 작업 공간을 원했던 예술가들이 그 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워홀도 이 때 맨해튼에 있는 낡은 모자 공장을 개조해 작업실로 꾸몄는데, 그 후로 그의 작업실은 '팩토리'로 불리게 됩니다. 1949년만 해도 시민의 8분의 1일 해당하는 100만 명이 공장 근로자였던 뉴욕은 예술의 중심지로 거듭나고 있었습니다.

 

"사업을 잘 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예술이다" - 앤디 워홀

이는 워홀이 뉴욕 광고계에 몸담았던 초기에 터득한 신조라고 합니다. 뉴욕으로 이사하자마자 워홀이 착수한 작업은 인맥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대형잡지사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하게 된 워홀은 얼마 후부터 예술계 모임에 드나들면서 주요인물들과 인맥을 쌓기 시작합니다. 워홀의 수첩에 유명 예술가들과 갤러리스트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히고, 머지 않아 그의 첫 작품도 팔리게 되었습니다.

 


"앤디 워홀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고 싶다면, 나의 표면을 관찰하면 된다.
그 표면 밑으로 숨겨진 건 아무것도 없다"
- 앤디워홀

자신의 소개처럼 앤디워홀은 자신이 생각대로 행동했고, 생각대로 예술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그림에는 그의 일상이 있었지요. 달러 지폐, 자동차 사고, 연쇄살인범, 수프 깡통 등 그가 찾은 그림의 대상은 일상적이고, 진부한 것들이었습니다. 그 시점 미술계는 아직도 추상 표현주의가 맹위를 떨치고 있었기 때문에, 앤디워홀의 작품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의 대표작 캠벨 수프 시리즈와 코라콜라 입니다.


앤디워홀 전시전에서 캠벨 수프 캔이 있을까요? 궁금하네요


  



팝 아트로 인해 예술의 세계에 일상 생활의 소재가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말은 즉슨, 일상의 모든 것이 예술이 됨을 의미했던 거죠.
일상 자체가 예술 작품으로 승화된다는 느낌을 받은 사람들은 앤디워홀에 빠졌습니다.




"착한 워홀은 워홀이 아니지. 사람이 이보다 짓궂을 수 있을까?
워홀은 예술사학자들에게 아주 골칫거리다.
워홀이 일부러 예술사를 무시하는지 아니면 아무 생각도 없는 것인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에 
그가 폭발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는 거다" 

- 로버트 라우센버그

신문이나 잡지에 등장한 사진을 캔버스에 옮기고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색의 변화만 주는 것이 워홀 작품의 특징입니다. 앤디 워홀의 일상생활을 그린 팝아트는 뉴욕 전역에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마릴린을 포함한 유명 인사들이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요청이 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워홀의 초상화 모델 중에는 배우 리즈 테일러, 독일 수상 빌리 블란트, 디자이너 조르지오 아르마니와 같은 유명 인사도 끼어있었습니다.  마릴린 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 그레이스 켈리 등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았던 여인들은 워홀 작품의 대표적 소재였죠. 그는 유명인들의 사진을 이용한 실크스크린 작품을 통해 현대 미국 문화를 대변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습니다.

  


왼쪽은 앤디 워홀의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인 마돈나 입니다. 잡지나 화면 등의 모습을 실사 스크린 작품은 하나밖에 없는 예술 작품에서 대량 생산이 가능한 작품으로 만들었습니다. 얼마전 세상을 떠난 마이클 잭슨의 그림도 있습니다.
앤디 워홀과 마이클 잭슨, 당대 최고의문화 아이콘들의 만남이죠!







워홀의 끊임없는 노력과 야망이 결실을 맺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워홀은 생전에 여러 유명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여는 영예를 누렸을 뿐만 아니라 국제 전시회를 통해 엄청난 부도 거머쥐었죠.
1963년부터는 《슬립》 《엠파이어》 등 실험영화 제작에 힘쓰고, 상업영화에 손대는가 하면 소설도 출판하는 등 다방면으로 활약하여 1960년대 미국 예술계를 대표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영화의 매력에 빠져든 그는 65년 공식적으로 `미술 세계에서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그가 만든 영화는 63년 첫 영화 `잠(sleep)`을 비롯해 280여 편. 영화 촬영 당시 그는 "나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나는 1년 전쯤 이를 포기했다. 그리고 지금은 영화를 찍는다. 나는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있지만 영화가 더 흥미진진하다. 그림은 단지 내가 지나왔던 과정이었을 뿐이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현대 미술의 아이콘이던 앤디 워홀은 1987년 2월 22일 담낭 수술과 페니실린 알레르기 반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이미 전설이었던 그는 동시대 문화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과 이를 시각화해내는 직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워홀은 자신의 예술을 '세상의 거울'이라고 말합니다. 스스로 기계이기를 원했던 워홀은 기계와 같은 미술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기계를 통해 무한히 복제되는 세계 속에서 그의 이미지도 그의 명성과 함께 증식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앤디 워홀의 전시는 따뜻한 바람이 부는 4월까지 진행된다고 합니다.
쉬는 날 한 번 냉큼 가줘야겠습니다. 시간이 나시는 엔자이머 여러분들도 원하는 전시가 있으면 가 보는게 어떨까요?
Input이 있어야 Output이 있지 않겠습니까. ^^

정말 마지막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찍은 저의 사진들을 몇 개 올려드리겠습니다.
얼마나 예쁘게 찍혔는지, 보는 이로 하여금 시선이 멈추는 사진입니다.

 

 

 

 

 

 

 

 

 

 


아, 저 당장이라도 나아 오를 듯한 저 푸른 날개짓 (ㅋ)

 


감귤 스타일의 콘텍트 렌즈 착용은 가끔 주체하지 못한 정도로 발휘되는 센스 덕분에 나왔습니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사슴에게 뽀뽀를 날려주는 친절함은 필수이지요.

 

 교양이 넘치는 블로그에서 이런 경망스런 (;) 모습을 보인 것은,  조금이나마 웃을 수 있을까 해서 올려봤습니다. ^^
그러니, 귀엽게 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제 개인 노트북 배경화면으로 계신 안철수 선생님의 이미지도 함께 올려드립니다.

 


우리 모두, 자신에게 큰 선물을 줄 수 있는 엔자이머가 되도록 노력해요 ^^
감사합니다. 

 














                                                                                                      

 반지혜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