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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Enzaim Insight/Enzaim Report

1-4. 기술 중심에서 경험 중심 시대로

기술 중심에서 경험 중심 시대로




 의료기술의 수준이 의료 서비스를 구매하는 소비자에게 최고의, 또는 유일한 조건이던 때가 있었다. 

의료 서비스의 최고 목적이 아픈 사람을 고쳐 건강한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라는 점에서 최고의 의료기술이야말로 최고의 상품가치를 갖는다고 하겠다. 오늘도 환자들은 자신을 건강한 몸으로 되돌려 줄 명의名醫를 찾아 헤맨다.



 하지만 의료 영역 역시 기술의 평준화로 다른 비즈니스 영역처럼 기술로 차별화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정보의 유통이 용이해지면서 기술의 독점권을 오래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개발된 기술이 전 세계에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경쟁에 익숙해진 의료 공급자들의 모방 속도도 빨라졌다. 의료 기술 외에 다른 차별화 요소를 찾아야 하는 과제에 직면한 것이다.



 경험은 기술보다 종합적인 구조적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모방이 쉽지 않다. 또한 경험은 다양성이 있어 잠재된 가치가 무한하며 새롭게 발굴될 가능성 역시 크다. 즉 경험은 차별화가 용이하다.



 최근 의료 서비스 분야에서 경험 중심 서비스의 중요성이 커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성형외과, 피부과 등 비교적 생명과 직접적 연관이 작은 분야에서 시작된 경험 중심의 의료 서비스는 이제 생사를 가르는 대형병원 의료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그 영역이 넓어졌다. 이 같은 변화는 기술의 차별화가 점점 어려워지고 경험 중심의 서비스가 마케팅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소비자 환자 의 경험이 치료 효과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미국 클리블랜드 클리닉이 진행하고 있는 HUSHHelp Us Supporting Healing 캠페인은 환자 경험 관리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HUSH는 영어로 ‘쉿, 조용히 하라’는 뜻이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를 한번 상상해 보자. 환자는 밤 늦은 시간에도 주사 및 링거 교체 등으로 수시로 잠에서 깨기 일쑤다. 잠이 깨기도 전에 회진 준비를 위한 레지던트와 간호사의 아침 점검이 있거나 각종 검사를 위해 검사실에서 이른 아침 시간을 보내기도한다. 이는 철저히 공급자 중심적 스케줄이다. 멀쩡한 사람도 병원에만 들어가면 환자가 된다는 말은 크게 틀리지 않다. 가장 편안해야 할 환자에게 병원은 가정에서보다 더 많은 스트레스를 준다. 병원은 환자들에게 육체적, 심리적으로 불편한 공간이다. 미국 클리블랜드 클리닉은 이런 경험을 개선하기 위해 환자들이 방해받지 않고 충분히 잠을 잘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환자의 취침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취침 시간에 간호사가 병실을 방문할 때 불을 켜는 대신 랜턴을 활용해 불빛을 최소화하려 노력했고, 각종 진단도 이른 아침을 피해 진행하여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 결과 입원 환자들에게 병원에 대한 긍정적 경험을 선사했을 뿐 아니라, 치료와 입원 기간을 꽤 단축하는 실질적 치료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세계 최고의 의료기술을 자랑하는 클리블랜드 클리닉의 경험 관리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지금은 제품이나 서비스에 가치를 두는 기술 중심에서, 사용자의 경험에 가치를 두는 경험 중심으로 가치의 중심축이 넘어가는 시기다. 클리블랜드 클리닉은 2010년부터 고객경험최고책임자라는 직책을 만들고 환자경험센터Office of Patient Experience를 뒀다. 환자경험협회Association for Patient Experience를 주도적으로 만들기도 했다. 미국 메이요 클리닉은 이보다 훨씬 전인 2008년부터 환자의 경험을 관리하는 혁신센터Center for Innovation를 설치한 바 있다. 국내에서도 환자의 경험 관리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경기도 일산에 위치한 명지병원은 환자 경험 관리의 선두주자다. 일찍부터 ‘환자공감센터’를 두고 환자의 경험 관리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의사들이 착용하는 긴 넥타이를 통해 감염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통한 감염을 줄이기 위해 ‘나비넥타이 착용 캠페인’을 벌이는가 하면, 응급실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어린이들을 위해 우주선 같은 어린이 응급실을 만들기도 했다. 강검진 결과지를 환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개선하고, 정형외과 외래를 환자 경험을 우선한 형태로 개선했다. 

이에 뒤질세라 서울아산병원도 2013년부터 ‘혁신디자인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고려대병원, 신촌세브란스병원 등 대형 대학병원들도 환자의 경험을 관리하는 헬스케어 서비스 디자인 조직을 구성했다.



 사용자, 즉 소비자의 경험은 소비자가 제품, 서비스, 회사와 상호작용을 통해 느끼는 만족이나 감정을 의미한다. 

만약 이 같은 경험이 수혜 당사자에만 머무른다면 그리 신경 쓸 일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과거1:1 커뮤니케이션의 시대에서 소셜네트워킹 서비스SNS 등 커뮤니케이션 채널이 1:多(다) 로 확대되면서 소비자 경험은 개인의 만족으로 끝나지 않고, 급속도로 다른 소비자에게 공유되고 확산된다. 확산의 결과는 또 다른 구매로 이어지는 순환구조를 형성한다는 측면에서 헬스케어 마케팅에 있어 소비자 경험 관리의 필요성은 지속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다.



 새롭게 도래하고 있는 경험의 시대는 헬스케어 시장에 새로운 직업군이 부상하는 환경도 조성할 것이다. 

기술의 시대에 의사, 약사, 간호사, 방사선사 등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직업군이 각광을 받았다면, 경험의 시대에는 보조적 역할에 머물던 여러 직업군이 헬스케어 시장의 중심으로 나오게 될 가능성이 크다. 간병인, 노인관리사 등은 대표적인 경험 관리사라고 할 수 있다. 

경험 관리는 궁극적으로 소비자와 공감할 수 있는 원활한 커뮤니케이션 스킬이 요구된다. 따라서 소비자와 헬스케어 공급자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연구하고 해법을 제시하는 헬스 커뮤니케이션 담당자들 역시 전문가로 각광받을 것이다. 정신 상담, 건강관리사, 서비스 디자이너 등이 치료 영역의 직업군 못지않게 중요해지는 시대가 올 것이다.